4. 26
전주 영화제에 왔다. 오전에는 썰렁하더니 지금은 아주 시끌벅적한 분위기다. 첫 회에 '투린에서의 니체의 나날들'을 보고 두 번째 '바라벤토'를 봤다. 상영관은 꽤 썰렁했다. 별로 인기가 없는 작품이라 그런지 아님 오늘이 실질적인 영화제 개막일이라 그런건지. 어쨌거나 축제 분위기는 난다. 날씨도 화창하고. 지금 내가 앉은 이곳은 그늘이라 그런지 조금 썰렁하다.
'니체..'는 독백 위주의 영화였다. 그래서 그런지 자막을 읽으나 영상을 제대로 못보는 불편함도 있었다. 니체가 어떤 인간인지 알고 봤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서양철학사' 하권의 중간쯤 읽고 있었는데 아직 니체까지는 안갔다. 니힐리즘에 대한 언급이 중간중간 나오고 니체의 독백에서 낭만주의를 경계한다고 했는데, 영화상으로 보면 낭만주의적 기질이 다분해 보인다. 그런 것들을 보면 20세기 이후의 인간들이 너무 이성적인 척 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니체는 철학자라기 보다는 시인, 문학인 아닌가? 영화에 나타난 그의 모습과 실제가 얼마나 다를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바라벤토'는 브라질의 흑인 어부들에 대한 얘기였다. 좀 오래된 영화인데(60년대) 아직도 미신과 주술이 지배하는 개화되지 않은 집단. 그리고 그곳에의 변화. 춤과 노래가 즐거웠는데 피곤했는지 중간에 좀 잤다. 음...
*이날 '아프간의 봄'을 보고 감독과의 시간을 가진 후 '즐거움을 위하여'를 봤다.
4. 27
'애니 매트릭스'와 '여섯개의 시선'을 봤다. 애니..는 비교적 작은 화면이라 그런지 무척이나 선명했다. 역시 환상적인 디지털 그래픽을 보여주었고. 그 어떤 감각보다 시각은 사람을 흡입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시각효과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건 분명 재밌을 것이다. 다섯편 중 첫 번째와 두 번째가 특히 맘에 들었다. 첫 번째 것은 로봇 SF에서의 너무 뻔한 설정을 따르는 지라 약간 식상한 면도 없잖아 있었지만.
여섯개의 단편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요즘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되어 더 그랬는지도. 그러나 반쯤은 내용이 진부했다.
그런데 영화제 내내 드는 상념들은 나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저렇게 비춰보고 맞춰보고 비교하고. 역시 산다는 건 끊임없이 귀찮은 생각을 해야 하는 일이다.
4.28
사랑방에서 나와 프리머스 2관 근처 카페서 까페라떼를 시켰다. 의외로 꽤 맛있어서 기분 좋다. 사랑방도 가격에 비해서 괜찮았고. 예정대로 1박 더 할 생각이다.
어제 '여섯개의 시선'에 이어 '디지털 삼인삼색'과 '저만치 서 있는 남자. 우크라이나 아줌마'를 봤다.
디지털..은 이라크 영화가 제일 재밌었다. 시력을 (선천적으로) 잃은 아이들이 촉감과 소리로 세상을 파악하는 것이 지금 내 관심사와 딱 맞아 떨어졌다고나 할까. 이라크 전통악기인지 북을 만드는 과정이 보여진다. 양을 도살해 가죽을 벗기고 아이들은 질 좋은 가죽을 사서 집으로 가져온다. 온 가족이 가죽 털을 뽑아 씻고 다듬고 정성껏 골라온 목재를 뽀개어 씻는다. 오프닝은 아이들이 손으로 북의 가죽 부분을 계속 쓰다듬는 걸로 시작한다. 다듬어 주는 것인지... 이상하게도 엔딩은 전혀 생각이 안나네.
일본 감독 작품은 의욕도 별로 없는 초라한 삶을 살고 있는 한 젊은이에 관한 얘기다. 정작 본인은 별로 신경쓰지 않지만. 한국 감독 작품은 잘 이해가 안갔다. 아무리 디지털이 주제라지만 지루했다. 보고 싶었던 '낙타들' 감독이라는데 좀 실망이라고 할까.
한 인간의 특성이라는 게 시간이 간다고 변할까. '저만치 서 있는 남자'는 80살 노인이 아직도 허황된 꿈을 갖고 일을 벌이는 얘길 한다. 자기는 성공한 인생이라며 애써(?) 자신을 속이고 의도하지 않은 작은, 큰 거짓말들을 입에 달고 산다. 안쓰럽지만 결국 대부분 그 비슷한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순전히 본인의 취향을 반영한 것일 뿐. 다수가 성공했다 생각하건 그렇지 않건.
'우크라이나 아줌마'는 꽤 좋았다. 20분 동안 폴란드에 가정부로 일하러 온 우크라이나 여자의 인터뷰 형식으로 진행된다. 처음엔 몰랐는데 인터뷰 내내 청소를 하는 집이 자기 집이 아니었다. 가정부라는 것도 중간에 알아챘다. 참 신기했다. 우크라이나 사람인데도 우리네 아줌마들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두고 온 딸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 지식인과의 결혼 및 이혼 과정. '사랑'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는 것. 우울함을 눈물로 달래고 미래의 사랑에 대해선 회의적인 모습까지. 역시 같은 문화의 남자와 여자보다 다른 문화 속의 여자끼리가 더 비슷한 점이 많은 것인지도...
여전히 계속 영화를 내 삶이나 삶에 대한 생각과 대치 시켜가며 보고 있다. 인생이란 뭔지.. 정말.
4. 28 이어서..
휴.. 피곤하다. 전북대 근처에서 맥주 마실 곳을 찾다가 간신히 들어온 이 곳이 꽤 맘에 든다. 아주 조용하고 맥주 500에 2000원 밖에 하지 않는다. 하하...
9시 48분. 10시 45분 차니까 아직 한시간 가량 남았군. 55분 거 타도 상관없고.. 마지막 영화가 힘들었다. 75분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더라.
'마라톤'은 편집증에 관한 영화였다. 역시 사전정보 별로 없이 가서 뭐에 대한(말 그대로 달리기일 거란 생각은 안했고) 마라톤인지 몰랐는데 기상천외하게도 크로스 퍼즐 맞추기 마라톤이었다. 기간을 정해 놓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퍼즐을 푸는 것. 지하철에서만 하길래 그 외의 장소에서는 안되는 규칙이 있는 줄 알았는데(아직 정확친 않다) 그것보다는 집중을 위해 시끄러운 걸 택한 것이었다. 좀 정도가 심하긴 하지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일 수 있다. 나도 편집증적인 면이 있다. 약하게는 술집을 고르는 것에서 부터 좀 강하게는 직소퍼즐 맞추기까지. 앉은 자리에서 직소퍼즐 천피스 짜리를 모두 맞추는 짓은 웬만한 집착 없이는 힘든 일이다. 남이 보기에는 전혀 쓸모없는 짓일지라도, 또 시간이 지나면 우스워 보이는 일일지라도 무언가 한가지를 '집요하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거다. 한편으로는 대단하기 조차. 요즘은 이런 '집요함' '몰아부침' 등이 내게 필요한 것들이란 생각이 점점 들고 있다.
(중략)
전혀 상관없는 것 같지만 위에서 적은 그런 생각들로 인해 '마라톤'과 '경계도시'는 긴밀히 연결된다.
'경계도시'는 지금까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았다.. 질문시간에 누군가는 '서정적인 형식'을 택했다고 좀 의아해 했었다. 그러나 난 다큐멘터리에서 너무 객관적인 시선을 내세워 오히려 그것을 내심 자랑하는 듯한 뉘앙스를 느끼게 되면 아쉽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감독 말마따나 어쩌면 다큐멘터리는 가장 주관적인 장르(?)인지도 모르겠다. 다들 어느 정도 객관적일 것으로 기대하고 영화를 접하지만 결국 주관에 의해 주장과 소재를 택하고 자료를 모으고 형식과 내용을 만들어 간다. 어짜피 영화를 통해서 현실은 편집되는 것이니.
삼십분이다. 이제 슬슬 나가야겠다. 시간 참 빨리 가네.
*이날 첫 번째 영화로는'미안해'를 봤다. 상영 내내 키득거리거나 박장대소를 해댔다. 무척 유쾌한 영화다.
4.29
덕진 예술회관에서 할 영화를 기다리는 중이다. 비가 와서 공원이 무용지물이 됐다. 그래서 지금은 전북대 앞에 와있다. 십분 있다 나가서 셔틀을 타면 되겠다. 여기는 '로즈버드'. 까페라떼가 1900원이라 웬일인가 싶었는데 맛은 별로 없다. 어제 이름없는 커피점에서 마셨던 커피가 훨 낫다. 뭐 그래도 그럭저럭..
어제 사랑방 104호는 4명 자리가 모두 찼다. 각자 혼자 온 사람들이고 함께 어울리면 재밌을 거 같았는데 아쉽다. 다음번 여행은 누군가와 함께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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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가는 기차다. 오늘은 그제 함께 묵었던 사람에게 얻은 '두 개의 초상'과 미리 예매해 두었던 '소피!'를 봤다. 앞의 영화는 폴란드 영화학도에 대한(졸업을 금방 했으니 학도는 아니군) 내용이었다. 아마 폴란드 영화는 처음 보는 것이지 싶은데 개인사 위주의 영화가 원래 많은 건지 궁금했다.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영화보다 더 인상적이었는데 정말이지 너무 정성스럽고 성실하게 답변해 주었다. 영화가 각 개인에게 말을 걸고 있는 거라고, 영화의 주인공 둘과 당신, 이렇게 셋이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해 보란 얘기를 했다. 사실은 이런 자리보다는 여러분 하나하나 각자와 대화의 시간을 갖고 싶다고 하더군. 본래 영화이론에 그런 관점이 있는 지 모르겠지만 인상적이었다.
긴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끝나고 '소피!'를 봤다. 생각보다 진지한 영화였다. 막 나가는 상황이 어쩌면 진부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극악한 상황설정)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었다. 잘 만들었다는 생각은 들지만 어쩐지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다. 마지막 영화, 피곤에 절은 몸이라 더 그랬던 것일까?
이번 영화제. 얻었던 표까지 해서 열 세편을 봤다. 좀 피곤했지만 그래도 재밌었다. 가장 좋았던 영화는 '경계도시'였다. 그 중에서도 송두율 교수가 비디오 강의를 끝내고 전화를 통해 학생들에게 했던 얘기. '통일'이라는 것은 결과보다 오히려 과정이 훨씬 중요한 거라고. 서로 조율하고 맞춰가고 다름도 확인하면서 만들어가는 모든 일들이 바로 통일이라고. 감독도 그런 맥락의 얘기를 했다.
동감이다. 그리고 참 신기하게도 애니 매트릭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도 그 비슷한 거다. ->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어떻게'가 삶이며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혹은 자신을 계속 속이며 살았을 때) 삶은 껍데기다.
2003-05-01